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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삶

산에 가봐라, 어리석었던 네 모습이 보이리라 (전투적 설악산 등반기)

산을 1박으로 간다는 것은, 불과 5년 전 만해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높디 높은 산은 그냥 눈으로 보면 되지, 굳이 힘들여 올라갔다가 다시 무거운 다리를 끌고 내려와야 하는 쓸데없는(?) 일을 왜 하는지, 또 사람들은 왜 그렇게 등산에 열광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나에게도 우연찮게 지리산에 갈 기회가 찾아왔다. 게다가 1박 3일의 빡센 일정이었다. 힘들것이 뻔히 예상되었지만, 전부터 꿈꾸었던 지리산에 대한 열망으로 나는 처음으로 등산화를 사 신고 이를 부득부득 갈며 악착같이 올랐고, 다리의 감각이 없어질 때쯤 나는 새끼발톱 두 개가 몽땅 빠진 채, 땅을 딛고 서있었다. 내려오는 절반은 얼굴에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었었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더 이상 산에는 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에게 2006년의 지리산은, 산의 신비로움과 등산의 묘미 따위는 일찌감치 배낭 저 구석에 넣어둔 채, 상처와 눈물 자국만 남은 줄 알았었는데, 참 묘하게도, 그때의 힘들었던 산행은 시간이 흐를수록 뇌리에 좀 더 깊숙히 자리 잡은 것 마냥,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다.


그렇게 5년이 흘렀고, 그 사이 1년에 단 몇 번, 한 손으로도 꼽을 정도만 산을 찾았고, 언제나 올라갈 때는 후회하며, 또 내려올 때는 약간의 뿌듯함을 가졌던, 그 상태 그대로였다. 그나마 ‘창수와 달팽이’라는 산행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그나마 예의상으로나마 산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정도랄까. 그러던 중 창수와 달팽이의 6월 산행은 1박 코스의 설악산으로 결정되었다. 함께 가자는 선배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흔히 유명한 산을 대하는 기분이 그렇듯, 지리산을 오를 때처럼, 산에 대한 이 몹쓸(?) 궁금증도 스멀스멀 생겨났다. 아마도 몇 년 전, 비선대를 아주 잠시 구경하며 동동주를 마셨던 기억, 케이블카를 타고 가을 설악산의 절경을 찔끔 맛봤던 기억이 남아있었기에, 제대로 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던 모양이다. 어쨌건 가기로 결심했고, 이번만큼은 지리산 등반 때처럼 눈물로 얼룩진 힘들었던 기억만이 아니라, 산을 제대로 보고 오자는 마음도 굳게 먹었다.


토요일 점심쯤 한계령에 도착해서 슬슬 채비를 갖춘 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비가 온다는 예보와는 달리 햇빛이 쨍쨍하지 않고 적당히 구름이 가려주어, 산에 오르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덥지 않아 천만 다행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아무리 그러한들, 힘든 건 힘든 거다. 한계령에서 한계령 삼거리까지의 약 두 시간 가량의 오르막은, 정말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올 만큼 힘들었다. 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어깨와 등을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가 점점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아... 나는 또 왜 산을 오르고 있을까. 후회가 몰려온다.


산을 오르다가 잠깐의 휴식 시간이 되면 무게를 줄일 요량으로 서로 자신의 배낭에 들어간 간식을 먹자며 난리다. 나도 내 배낭을 풀어헤쳐보지만, 아뿔싸. 꺼낼 것이 없다. 내 작은 배낭 속에는 먹을 것보다는 전부 그냥 ‘나의 짐’이다. 마치 지난 삼십년간의 내 삶의 무게를 짊어진 듯, 정신이 아득해 진다. 뭐에 쓰려고 이렇게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전부 싸왔을까. 다음번 등산 땐 배낭꾸리는 법부터 다시 배워 오리라. 지쳐있던 나에게 대장님(창수와 달팽이 등반대장 이 모 선배님)께서 슬며시 비장의 간식을 건네신다. 엉겁결에 받아든 열대과일맛 젤리음료는 순간적으로 힘을 낼 수 있게끔 도와주는 파워 에너자이저란다. 고칼로리 음료를 쪽쪽 빨아먹고 나니 또 힘이 불끈 솟는 느낌이다. 역시 대장님은 우리 산행팀에서 엄마 같은 존재다. 최고다.


한계령 삼거리를 지나고 나서는 그래도 좀 오를 만 했다. 역시 유명산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 때마다 인사로 서로에게 기운을 주고 받는다. 산에서 맛볼 수 있는, 서로에 대한 예의이다. 낯선 이들의 인사가 때로는 무한한 힘을 주기도 한다. 그 때마다 나도 그들에게 힘을 실어 인사에 답한다. “감사합니다. 좋은 산행 되세요~!”


끝청을 지나 중청으로 가는 길은 능선이다. 한낮인데도 구름이 하늘에 가득이다. 이 쯤 되면 햇빛이 산을 한번 훑어내어, 설악산 절경을 한 폭, 한 폭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신 뿌연 안개같은 구름이 능선을 타고 넘는 모습을 탄성으로 맞이하였다. 그 옛날 과학시간에 배웠던 푄 현상도 기억이 났다. 역시, 아직 머리가 녹슬지 않았군..; 산등성을 타고 올라오는 구름에 얼굴을 대고 공짜 ‘미네랄 워터 마스크팩’을 한다. 찝찌무레하게 흐르던 땀조차 싸르르 식어버릴 만큼 시원하다. 능선을 타고 오며 내내 희뿌연 앵글만 우리 눈앞에 펼쳐졌지만, 구름에 휩싸인 묘한 분위기 속에서 만끽하는 설악의 화폭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어느새 저녁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중청대피소를 향해 발길을 서둘렀다. 선발대는 벌써부터 도착해서 식사준비를 하고 있단다. 제발 고기는 남겨달라고 애원하며 대피소로 향했다. 저 멀리서 구름이 걷히며 대피소의 형상이 나타날 때, 우리는 마치 일주일 정도 굶주린 이리떼처럼 환호를 질렀다. 드디어 도착했다! 소주가 입안에서 어찌나 살살 녹던지, 삼겹살이 어찌나 달근하게 착착 감기던지, 그 맛은 죽어도 못 잊을 것이다. 각자 삼겹살 삼인분에 소주 일병으로 속을 뜨끈하게 데워주고 나서, 내일의 일정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4시쯤, 대청봉에 오르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날씨가 전날 같으면 대청봉에서 해돋이는 꿈도 못 꿀 텐데, 걱정이다. 게다가 밤새 비까지 내린 터라, 역시 밖은 축축한 기운 일색이다. 서둘러 대청봉으로 출발했다. 중청에서 대청봉까지는 무척 가깝다. 설악산 정상에 올라서서보니 역시나 하늘은 이미 환히 밝았지만 구름이 한 가득이다. 저 멀리 동해바다위에서 뾱!하고 튀어 오르는 해를 보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구름 가득한 하늘을 배경을 사진을 서둘러 찍고 나서 중청으로 내려왔다. 산에만 오면 백배는 맛있어지는 라면과 쌀밥으로 허기를 채우고는 오늘의 일정을 위해 또다시 출발이다.


이튿날은 공룡능선으로 내려갈 팀과 천불동으로 내려갈 팀으로 나뉘었다. 빡세기로 유명한 공룡능선으로 내려갈 팀원들을 위해 어젯밤에 준비한 묘한 맛(?)의 주먹밥을 두 손 가득 쥐어주고 눈물로 팀원들을 배웅했다. 이제 우리도 하산이다. 하산길이라고 절대로 만만히 보면 아주 큰일 난다. 어린 날, 산에 대해 개뿔도 모르던 시절, 운동화 신고 산에 왔다 내려가는 길에 무릎과 발목이 그야말로 아작 났다. 그 후로는 등산화를 신어도 내려가는 길은 항상 아찔하다.


다행이 아침이 되면서 점점 날이 밝아온다. 해가 비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설악의 골짝골짝을, 화폭을 하나둘 펴듯 감상할 시간이다. 아.. 정말 절경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천상에서 가을 설악을 구경했을 때 보다 더 장관이다. 아마, 이 산을 내 두 발로 딛고서서 산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가을의 울긋불긋, 알록달록한 다채로움은 없지만, 짙푸르른 녹음이 정말 숨막히듯 가슴에 오롯이 새겨졌다. 생명이 숨쉬는 느낌, 한 그루의 나무에서부터 등산로 따라 흐드러진 풀잎, 재잘재잘 지저귀는 산새와 사람이 낯설지도 않은 듯 장난치는 다람쥐들, 지처 힘들어 앉은 바위 아래서 쉴 새 없이 바쁜 듯 돌아다니는 왕개미들 까지, 하나하나 그네들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었다. 흐르는 땀을 훅~하고 씻겨내 주는 시원한 바람과 언제나 힘들면 쉬어가라며 아름드리나무가 만들어준 햇빛 아래 그늘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 이래서 산에 오르나보다. 나는 또 하나를 알아버렸다. 산에 오르는 이유를 또 하나 만들어 버렸다.


살다보면, 자신의 문제가 가장 크고 가장 깊어보여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때 산을 오르면, 물론 오르는 동안 힘들어서 잠시 후회도 되겠지만, 스스로 정한 목표만큼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엔 그보다 더 뿌듯할 때가 없다. 산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은 나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모습과 함께 산에 오른 일행들의 서로를 향한 응원 속에서 나는, 나와 세상 사이에 놓여있던 보이지 않는 벽을 어느 순간 깨트리고 있었다. 산에서 각자의 생을 살아가고 있는 생명들은 나에게 어느 순간 소중한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대단하진 않지만, 소박한 이 깨달음 때문에 또 다시 산을 찾을 것 같다. 조만간 또, 산을 그리워 할 것이다.


설악산을 내려왔을 때는 새끼발톱도 빠지지 않았다. 죽을 만큼 힘들어서 이 악물며 다시는 산에 오지 않겠다는 앙심도 품지 않았다. 대신 좀더 건강해진 내 자신과 서로서로 좀 더 끈끈해진 우리의 관계, 그리고 세상을 향해 좀더 가까이 다가갈 방법과 용기를 가득 안고 두 발로 내려섰다.


(이 글의 축약본은  월간 노동세상 8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와우!)

 

창수와 달팽이 다음 블로그에서 무단 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