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책하는 삶

<제주-물찾오름>제주의 속살과 만났던 하루

축제의 계절 5월, 어느 주말에 근무에 차출되었다.

대신, 평일 하루를 휴가로 받았다.

고민 끝에 어영부영 보내기 쉬운 평일 단 하루의 휴가를

아주 알차게 보낼 방법을 계획해보았다.

2016년 6월, 한시적으로 개방되는

제주도 물찻오름!

사려니숲길을 통해 갈 수 있는 그 곳, 물찻오름은

제주생물권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터라

한시적으로 개방이 된다고 한다.

사려니 숲길(비자림로)- 물찻오름(왕복)-삼나무숲길-남조로에 총 20km 정도의 코스.

그래, 여기다.

가자.

 

새벽 첫 비행기로 출발.

 

 

날이 추적추적, 물찻오름 시작점에 도오착.

 

 

누가 이렇게 이쁘게 꽃잎 글자를 만들어 두었을까.

 

 

떨어진 꽃잎에 취해 나도 한 컷.

 

 

촉촉해진 길을 부지런히 걸어,

물찻오름 입구 도착.

 

 

 

간단하게 물찻오름의 기원, 생태에 대한 설명을 듣고,

20명정도씩 그룹지어 출발.

짝꿍없는 나는 성큼성큼 선두로...

두런두런 이야기소리에서 멀어져 새소리, 풀잎향에 취해서 걷는다.

내가 온전하기 숲속에 안겨 있다는 느낌,

포근하고 싱그럽다.

이 순간, 이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존재에게 감사했다.

최대한 조용히, 조심히 다녀갈게, 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숨이 턱까지 훅, 훅 차오르다 어느 순간,

짜잔.

 

 

우거진 나무사이로 아주 잘 보이진 않지만

물이 차 있는 오름이 보인다.

올해 물찻오름 개방 기간 중에는 계속 흐리고 비가 왔던 터라,

오늘처럼 이렇게나마 볼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물이 마르지 않은 물찻 오름,

숲에 포근히 싸여있던 신비로운 모습 그대로 잘 보존 되었으면 좋겠다.

 

 

 

사려니숲길의 매력은 구간구간마다 마치 다른 테마로 꾸며진 것처럼,

다양한 군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쭉쭉 뻗은 삼나무 사이로 걸어보고,

 

 

마치 차가 지나갈 수 있을 법한 넓은 임도도 지나보고

(하지만 차는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넹..)

 

 

이렇게 조금 좁은 임도도 지나가게 된다.

 

길의 중반부를 지나고 나서는 지나가는 사람도 보기 힘들다.

심지어는 일부러 음악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이길을 걷는 내내 지루해질 틈이 없었다.

해가 나면 땅에 비친 그림자를 볼 수 있어 좋고,

구름이 끼면 하늘을 볼 수 있어 좋다.

좋은 길을 걸을 땐, 마치 나무 숨결이 느껴져서 좋고,

넓은 길을 걸을 땐, 지그재그 두리번 거릴 수 있어 좋다.

이름 모를 풀을 만나면, 그 풀의 생김에 집중할 수 있어 좋고,

이름이라도 아는 식물을 만나면, 고향사람 만난듯 반가워서 좋다.

나무와 바람과 새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마치 나도 이 곳의 한 식구같은 생각이 들만큼 편안해서 좋다.

호방하게 자신의 속살을 보여줘서 고마웠고,

또 이렇게 나마 보존되어지고 있는 것이 감사했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있는 그대로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부끄러운 일이다. )

 

 

이곳부터 삼나무 전시림.

한참을 걷던 중, 삼나무 전시림 입구에 도착했다.

시간이 조금 애매해서 이곳은 그냥 지나칠까, 고민했었는데

전시림 입구에 계신 도우미 분께서

한번 들렀다 가라신다. 끝내준다고.

계속 삼나무 보고 왔는데, 뭐가 다른건가...? 살짝 의심이 들었지만,

그리 길지 않은 길이라기에 들어가본다.

 

 

 

 

 

 

이곳 전시림에 있는 삼나무는 앞서 보았던 월든삼거리의 삼나무와는 차원이 다르다.

앞서 보았던 것이 1970-80년대 조림된 것이라면,

전시림에 있는 삼나무들은 1920-30년대 생들이라고 한다.

무려 10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자라온 나무들인 것이다.

숲에 들어가보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지들이 빽빽하고 촘촘하게 뻗어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약간 어둡고 축축해진 데크를 걸으려니, 음산한 기운에 몸이 저절로 긴장하게 되었다.

 음산함이라...

어디선가 어슬렁 거리는 노루나 곰 한마리(읭???)가 지나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다행이도(!) 삼나무숲에서 어슬렁거리는 동물은 단 한마리도 보지 못했다. 하긴, 이런 곳에선 동물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니...)

 

짧게 한 바퀴를 돌았다. (삼나무 전시림은 짧은 코스와 긴 코스, 두 가지 종류 산책길이 있다.)

뭔가 아쉬웠다.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다시 긴 코스를 향해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숲의 기운은 나에게 점점 편안하게 다가왔다.

생각해보니 한번도 이런 숲 속에 혼자 있어본 적이 없었다.

도심 속에서 이런 숲을 만날일이 드물기도 하지만,

더욱이 혼자 그곳에 가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그 낯섦이 나에게는 음산함으로 다가왔을 수 있고,

그 낯섦이 불편함이 되었을 수 있다.

전시림 속살까지 걸어들어가보면, 왠지 모를 묵직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오랜 세월을 묵묵히 버텨온 삼나무의 기운이기도,

초록초록한 숲속에서 느껴지는 농도짙은 산소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숲이 인간에게 건내는 오래된 인사일지도 모른다.

익숙하지 않지만, 익숙하지 않아서 더 좋은 숲의 인사.

오랫동안 나만 알고 싶은, 숲과 나의 비밀이 만들어진 순간이다.

또 올게.

 

아마, 이즈음에서 핸드폰이 방전된 듯 하다.

가져왔던 보조배터리는 연결잭을 잘못 가져온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방전된 핸드폰 때문에 또 잠시 멘붕이 되었지만,

어쨌거나 다시 걸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계획했던 대로 남조로 방향 사려니숲길 입구에 도달했고,

무사히 제주시에 도착,

보말 칼국수로 늦은 점심을 먹고, 시장에 들러 오메기떡을 사서 공항으로 향한다.

 

 

출근하지 않는 하루는 너무 금세 지나가버린다.

하지만 오늘 하루 숨쉬고 생각하고 느꼈던, 이 진한 기운은

또 다른 '일탈'을 계획하는 마중물이 되겠지.

또 떠나보자!